이름을 불렀을 때
버드박스에서 주인공은 임신한 아이의 이름을 짓지 않습니다. 심지어 태어난 이후에도 "보이, 걸"이라고만 부르죠. 왜일까요? 버드박스의 메인소재가 "반출생주의", 노골적으로 말하면 임신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순간 상대와 나는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버릴 태아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보이와 걸은 태어난 이후에도 문학적으로는 태아 상태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목할 것은 주인공이 '아이를 낳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가 과연 행복할까?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태어난다는 건 과연 축복할 일인가? 너는 지금 세상에서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작품이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 거죠. 이는 '반출생주의'의 문제제기입니다만, 그와 반대로 주인공은 아이를 낳고 결국에는 이름 지어주기를 택합니다.

공중에 떠있는 아름다운 것
정체는 불명입니다만 첫 번째 가설은 그걸 보자 사람들이 아름답다며 자살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때, 그것이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천국이 있겠죠. 두 번째 가설은 아름답다는 게 반어법인 경우인데 너무 끔찍해서 도망치고 싶은 무언가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두 경우 모두 현세에서 사느니 당장 죽는 게 낫겠다는 귀결을 얻게 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보고도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싸이코패스'죠. 이 놈들은 현세에서도 살만합니다. 남을 속이고 빼앗고 죽이면서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죠. 사실 이 녀석들이 삶을 힘들게 만드는 원흉입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리죠.
그럼 왜 낳았나?
이렇게 가혹한 세상에서 주인공은 아이를 낳습니다. 동료의 아이도 기르죠. 왜 그게 가능했을까요? 자신과 아이를 지켜줄 가족이 안전기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말에선 왜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작은 사회(세상)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신뢰의 진화
신뢰의 진화라는 짧은 웹게임이 있습니다. 게임이론을 시각화해 놓은 좋은 작품입니다. 여기서는 여러 조건에 따라 세상에 싸이코패스만 남기도 합니다. 선한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사이코패스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죠.

하지만 "강단 있는 착한 사람"이 자기들끼리 힘을 합치면 사이코패스를 몰아내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죠.

결국 이 세상이 아이 낳고 살기 좋은 곳인지 아닌지는 나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속이고 헐뜯고 빼앗을수록 그러기 힘들어지고, 나누고 돕고 격려할 때 더 좋아지겠죠.
[신뢰의 진화 링크] https://osori.github.io/trust-ko/

주인공은 그런 작은 사회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시각장애인들의 학교였죠. 물론 정상인들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그 안에서는 안대를 벗고 웃으면서 생활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서 버드박스의 새가 우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양목사와 대중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징어게임, 창조적 해석 (0) | 2025.01.18 |
|---|---|
| 용서는 피해자에게 받는 거 아니야? - 밀양, 열혈사제 (0) | 2024.07.15 |
| 지은탁은 1화에서 자살할 생각이었다 (0) | 2024.07.15 |